(2007. 8.)

베리만! 당장 관속에서 나와라!

이는 현재 김진희씨의 네이트온 대화명이다. '베리만'은 7월 30일 사망한 스웨덴 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(잉마르 베리만)을 가리킨다.
 
그러니 김진희씨는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가 살아서 돌아오기...를 바라는 척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은 잘 알고 있을테고-_- 그가 죽지 않았다면 만들(수도 있을 : 감독은 "영화산업은 매춘이다"라는 말을 남기고 은퇴생활을 했다고 하니) 영화들을 보면서 자신이 누릴 기쁨이 상실된 데 대해 슬퍼하고 있는 듯 보인다. 또한 나는 느낌표가 두 번 찍힌 이 짧지만 격한 문장에서, 그가 만든 작품들과 동류의 (다른 감독의) 영화들을, 앞으로 관람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그녀 자신의 (아마도 불안한) 바람도 얼추 읽는다.
 
김진희씨, 라고 어색하게 호칭하는 이유는 내가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. 우리는 지난 겨울 채팅을 통해 서로 알게 되었다.
 
당시 내가 만들어 놓은 채팅방의 제목은 "가늠할 수 없는 안부들을 여쭙니다"였는데, 기실 그 방제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보낸 회원메일에 쓰여져있던 문장을 훔친 것이었다(엄밀히 말하면 그 문장의 원소스는 김애란씨의 소설집 <달려라, 아비>이지만 나는 그 소설을 읽지 않은 채 메일만 봤으므로). 시간이 지나고 한 여자가 들어왔고, 대뜸 이렇게 물었다. 나 이 문장 최근에 봤답니다. 영화 카테고리에 방이 개설돼 있었으므로, 나는 순간 흠칫했다.
 
그녀는 "필 받을때" 한 달 내내 영화를 보는 영화광이었다. 그리고 또렷한 '영화제 키드'이기도 했다. 2003년 베를린영화제를 다녀왔다는 말에 난 뒤집어질 듯 질투했다. 하지만 그녀는 전주국제영화제가 더 좋다며 이렇게 말했다. "베를린에는 한글자막이 없잖아."
 
무엇보다, 당시 전주영화제 자봉 면접을 앞둔 나로서는, 그녀가 전주에 살고 있고 전주영화제 자봉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다. 여러가지를 물었고 그녀는 답했다. 면접에 붙은 후 우리는 네이트온으로 종종 연락했다. 영화제 얼마 안 남았죠? 바쁘겠네요. 히히, 영화제 할때 봐요! 맛있는거 사줘요.
 
그러나 서로의 바쁨으로 인해 그녀와 나는 영화제 기간에 보지 못했다. 자정부터 새벽 6시까지 세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'불면의 밤' 첫째날, 어렵게 입석을 구한 그녀와 쉬는시간을 취재했던 나는 아마 같은 공간에 있었을 터이지만, 나도 바빴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.
 
그러나 사이버스페이스상의 대화는 지속되었다. 그녀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, 내가 종종 먼저 말을 건넸다. 그녀는 "인간관계는 모순적이지만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다"는 우디 알렌의 말에 동의하며 그의 영화를 좋아했고, '인생의 영화' 중 하나로 도리스 되리의 <파니핑크>를 꼽았다.
 
"제가 사랑하는 베리만씨가 죽은거 알아요?" 오늘, 말을 걸자 그녀는 곧 이렇게 반응했다. "나한텐 최고의 감독이었는데." 그의 이름을 두꺼운 '영화의 이해' 책에서밖에 본 적이 없는 나는 난감했다. 어릴적부터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온 그녀는 <외침과 속삭임>을 보고 "평소 종교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심하던 내가 인간에 대해 갖고 있었던 그 자체를 표현했다는 느낌이었다"고 전했다.
 
그녀와 한 시간이 넘도록 얘기한 후 나는 결심했다.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대신 베르히만 감독에게 가야지(두 영화제는 거의 겹친다). 상영되는 7편의 영화들을 보면서 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노력해야지.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는, 아래와 같이, 진심이 담긴 이쁜 말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.
 
"나, 이벤트를 통해 베를린 영화제 가긴 했는데, 참가할때부터 내가 갈 줄 알았어요. 왜냐면... 내가 갈 거라고 생각했거든요. 정말 가고 싶어했으니까... 그냥 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준비했어요."
 
당신의 소박한 바람인 '편하게 아무데서나 담배 필 수 있는 것'이 이뤄지기를 바란다. 조만간 우리 만날 수 있기도. 같이 영화를 보면서 긴긴 시간 얘기를 나눌 수 있기를 또한.
 
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
 
2008년 2월 현재, 우리는 아직까지 만나지 않았다 -_-;;
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종종 메신저로 대화를 한다. 조금은 더 짖궂게, 그러니 조금은 더 편하게.

아, 그리고 난 베르히만 감독의 영화 <가을소나타>와 <제 7의 봉인>을 봤다.
두 영화 모두 혼자, 덜덜 떨면서.
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
Creative Commons License
이올린에 북마크하기(0) 이올린에 추천하기(0)

Trackback Address :: http://teatr.tistory.com/trackback/55

댓글을 달아 주세요

  1. 찐찐 2008/07/23 13:30 Address Modify/Delete Reply

    영화산업은 매춘이다..라는 말을 잘못 파악한듯하오.

    문맥상 그게 은퇴하면서 했던 말임에 유념해야하오.

    • 질투는나의힘 2008/08/21 03:09 Address Modify/Delete

      찐찐님ㅋㅋ 전 '매춘'이라고 말한 것에 어떤 가치판단을 제 글에 부여하지 않았어염.

      그냥 그렇게 말하고 '은퇴'했다는 데 방점이 찍혀있답니다 :)